<웨신해설 48> 언약과 유언_김병훈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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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과 유언 <74>

< 김병훈 목사, 합신 조직신학 교수 >

 

7장 4항: “이 은혜언약은 성경에 종종 유언이라는 이름으로 진술되어 있다. 이것은 유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영원한 기업과 그것으로 유증이 되는, 그것에 속한 모든 것들과 관련한 것이다.”

 

 본 항은 하나님의 은혜언약이 성경에 유언이라고도 불리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그 까닭을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은혜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비로소 성취가 됩니다. 이처럼 은혜언약의 생명의 기업과 그것에 속한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없이는 주어지지 않으므로, 신앙고백서는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언약을 ‘유언’이라는 이름으로 진술하고 있다고 교훈을 합니다.

 

  1. 언약인가, ‘유언인가의 문제

 

그런데 신앙고백서처럼 언약을 유언으로 부르는 것이 옳지 않다는 이의를 제기하는 견해가 있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것은 이상한 반응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성경이 스스로 언약을 유언이라고 일컫고 있다면, 성경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언약은 유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신학을 성경 위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신학을 앞세워 성경의 진술마저도 옳고 그름의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약을 유언으로 일컫는 것과 관련해 이견이 나오는 까닭은 신약성경이 표기하고 있는 그리스어인 ‘디아세케’(διαθήκη)가 어떤 의미로 쓰여 있는 것인가에 대해 다소 논란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디아세케’(διαθήκη)라는 단어의 의미와 관련한 성경 해석상의 논란인 것입니다.

한국어나 영어로 번역된 성경이 ‘디아세케’(διαθήκη)를 ‘유언’으로 표기할 경우, 그것은 성경이 사용한 ‘디아세케’(διαθήκη)를 그대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해석하여 제시한 것입니다.

‘디아세케’를 유언으로 번역을 하는 것에 반대하는 견해에 따르면, ‘디아세케’(διαθήκη)라는 그리스어가 ‘언약’과 관련하여 표기가 된 것은 ‘디아세케’(διαθήκη) 자체의 의미가 언약을 뜻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히브리어(일부 아람어)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이 히브리어 ‘베리트’(ברית)를 번역하기 위하여 ‘디아세케’(διαθήκη)라는 단어를 사용한 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본래 언약을 뜻하지 않는 ‘디아세케’(διαθήκη)라는 단어로 언약을 뜻하는 히브리어 ‘베리트’(ברית)를 번역한 70인역의 용례를 고려할 때, ‘디아세케’(διαθήκη)의 의미는 새롭게 부여된 ‘언약’의 의미로만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즉 70인역이 ‘디아세케’(διαθήκη)를 언약의 뜻으로 번역하여 사용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을 언약 이외의 다른 뜻으로 번역을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1. 언약을 유언으로 말하는 이유

 

사실 ‘디아세케’(διαθήκη)의 본래적인 의미는 ‘언약’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의 중심 뜻은 ‘처분’ 또는 ‘유언’이었으며, ‘언약’을 뜻하는 그리스어는 ‘순세케’(συνθήκη)이었습니다.

바빙크(Hermann Bavinck, Reformed Dogmatics, vol. 3)의 인용에 따르면, 본래 ‘디아세케’(διαθήκη)는 언약이라는 개념을 내포한 적이 없으며, 오직 ‘유언’을 의미하는 단어이었습니다.

그런데 70인역이 ‘언약’을 ‘순세케’(συνθήκη)가 아니라 ‘디아세케’(διαθήκη)로 번역을 하였으며, 그 결과 ‘디아세케’(διαθήκη)에 ‘언약’이라는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그러니까 70인역은 ‘유언’을 의미하는 ‘디아세케’(διαθήκη)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성경의 ‘언약’을 가리키는 단어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70인역이 어떤 이유로 언약을 뜻하는 그리스어로가 아니라 ‘디아세케’(διαθήκη)를 택하여 사용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몇 가지 추론이 되고 있습니다. 벌코프(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에 따르면, 성경의 언약 개념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추론이 됩니다.

성경의 언약은 언약 당사자들이 서로 쌍방 간에 대등한 가운데 세워진 것이 아니며, 또한 언약의 성취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언약을 이루시는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과, 언약 당사자인 하나님과 인간이 수평적인 동등의 관계가 아니라는 언약의 성격을 반영하는 데에 있어서, ‘디아세케’(διαθήκη)가 ‘순세케’(συνθήκη)보다도 더욱 타당하기 때문에 ‘언약’을 ‘디아세케’(διαθήκη)로 번역을 하였으리라 판단이 됩니다.

이러한 설명은 바빙크에 의해서 제시된 것입니다. 바빙크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의 특수한 성격을 설명합니다: 본래 하나님의 언약은 그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베푸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스스로 맹세하신 바에 의한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하여 죄 가운데 빠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희망을 상실하지 않고 하나님의 용서를 입어 새로운 순종에로 나가게 됩니다. 이러한 언약의 성격은 은혜언약이 인간의 능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일방적으로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빙크는 이러한 언약의 특성을 고려할 때, 70인역이 ‘언약’을 표기하기 위하여 ‘순세케’(συνθήκη)가 아니라 ‘디아세케’(διαθήκη)를 택한 것은 타당한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1. 유언의 실효성과 관련된 당시 사회법

 

그렇다면 ‘디아세케’(διαθήκη)가 본래 ‘유언’의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70인역에서 그것을 ‘언약’의 의미로 사용한 이상, 어쨌든 ‘유언’이라고 번역을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일까요? 무슨 이유로 신앙고백서는 은혜언약이 성경에서 유언이라는 이름으로 진술이 되고 있다고 교훈을 할까요? 그것은 언약과 성취의 관계에 있어서 언약을 주신 그리스도의 죽음의 역할 때문입니다.

흥미롭게도 바빙크는 유언의 의미와 관련하여 그리스-시리아 법과 로마법에 따른 이해의 차이를 제시합니다.

그리스-시리아 법에 따르면 ‘디아세케’(διαθήκη)는 자산과 권리의 취소되지 않는 양도를 의미하지만, 유언자가 죽지 않아도 부분적인 실행의 가능성을 지닙니다. 반면에 로마법에 따르면 유산의 증여는 유언자가 죽을 때까지는 실행이 되지 않습니다.

즉 유언자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로마법에 따른 유증의 의미를 담아, 유언자인 그리스도의 죽음이 언약의 성취가 됨을 말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디아세케’(διαθήκη)가 사용이 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을 말합니다.

하지만 바빙크는 로마법에 따른 유언자의 죽음과 관련한 의미로 명확하게 드러나는 사례가 다만 히브리서 9:16-17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일 뿐임을 지적합니다. 즉 ‘디아세케’(διαθήκη)에 담겨 있는 ‘유언’의 의미는 새 언약의 성취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죽음을 말할 때에만 분명하게 드러나며, 다른 모든 경우에는 ‘유언’보다는 ‘언약’의 의미가 더욱 분명합니다.

새 언약과 관련한 그리스도의 죽음의 역할을 반영하여, 화란어 성경과 영어 성경(흠정역)은 대체로 구약의 이스라엘과 관련하여서는 ‘디아세케’(διαθήκη)를 ‘언약’으로, 신약의 교회와 관련한 새 언약을 가리킬 때는 ‘디아세케’(διαθήκη)를 ‘유언’으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해 벌코프는 이처럼 구약에서는 언약으로, 신약에서는 유언으로 해석하는 일반적인 처리보다도, 미국개정판 성경(American Revised Bible)처럼 히브리서 9:16-17의 구절만을 ‘유언’으로 번역하고, 다른 구절들은 ‘언약’으로 번역한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말합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벌코프가 요약하고 있듯이, 히브리어로는 언약을 분명하게 가리키는 ‘베리트’(ברית)가 그리스어로 번역이 됨에 있어서 ‘언약’이 아니라 ‘유언’의 의미를 가진 ‘디아세케’(διαθήκη)가 사용이 된 것과, 그것으로 인하여 성경이 은혜언약을 ‘유언’으로 진술하고 있다는 해석과 번역이 나타나고 있는 이유가 세 가지로 제시됩니다.

하나는 언약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도권을 특징적으로 드러내는 단어로 본래 언약을 나타내는 그리스어인 ‘순세케’(συνθήκη)보다 ‘디아세케’(διαθήκη)가 더 타당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신약성경의 ‘디아세케’(διαθήκη)의 경우들을 ‘유언’의 의미가 분명한 히브리서 9:16,17의 ‘디아세케’(διαθήκη)와 일치시키고자 하는 노력에서 비롯됐다는 것이고, 마지막 하나는 라틴어 성경이 항상 ‘디아세케’(διαθήκη)를 ‘유언’을 뜻하는 ‘테스타멘툼’(Testamentum)으로 번역한 것에 대한 반영이라는 것입니다.

 

미치는 말

 

이러한 설명들 이외에도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은혜언약의 실행과 관련한 성경의 설명과 신학적 이해입니다.

신앙고백서에서 보듯이 “은혜언약이 성경에 종종 유언이라는 이름으로 진술되어 있다”고 진술하면서 그 까닭과 관련하여, 신앙고백서의 진술 후반에 언급하고 있는 부분에 주목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유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영원한 기업과 그것으로 유증이 되는, 그것에 속한 모든 것들과 관련한 것이다.”

여기서 은혜언약을 ‘유언’이라는 의미로 풀어낼 필요와 관련하여 신앙고백서는 “유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비로소 언약이 약속한 “영원한 기업과 그것에 속한 모든 것들”이 주어진다는 사실이 마치 유언에 따라 유증이 되는 것과 동일한 원리를 보여주고 있음을 언급합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서의 설명은 적절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히브리서 9:16,17절에서 사도가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튜레틴(Francis Turretin,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 vol. 2)이 설명하고 있는 바와 그대로 일치합니다. 튜레틴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지적합니다.

■하나는 ‘디아세케’(διαθήκη)의 유언적 의미와 관련하여, 유언자의 죽음이 선행됨으로써 유언의 약속이 실행이 되는 것과 같은 유언적 성격이 하나님의 언약에 반영이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유언이 유언자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상속자만을 위한 것이듯이, 하나님의 언약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언약의 백성인 우리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끝으로 언약의 조건이 비록 쌍방적인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에 근거하여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이, 마치 상속자가 누리는 유업이 상속자의 공로가 아니라 유언자의 은혜로 인한 것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짧은 한 항목에서 이러한 개혁신학의 언약의 이해를 함축하여 “이 은혜언약은 성경에 종종 유언이라는 이름으로 진술되어 있다”고 고백을 합니다.

여기에서 살핀 본 항목은 비록 짧은 한 문장이지만, 그러한 압축적인 진술 속에 개혁신학의 많은 노력을 담아내고 있는 신앙고백서의 깊이를 다시금 인식하게 합니다.